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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두 영웅, 한니발과 스키피오

기원전 3세기경 카르타고의 용장 한니발과 로마의 지장 스키피오가 제2차 퓨닉 전쟁 중 서로가 조우해 한때는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그리고 마지막에는 로마의 스키피오가 각기 승전의 영광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이들 두 사람은 비록 전쟁터에서 만난 적장이기는 하나 각기 자기의 조국을 위해 싸웠으며 마지막까지 서로가 배려하다 같은 해 둘 다 생을 마감했다.

한니발은 이스탄불의 마르마라 바닷가에서, 스키피오는 반도의 깜파니아에서 그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접었다.



제2차 퓨닉 전쟁

BC 2~3세기경, 지중해 연안에 입지한 두 나라가 패권을 다투고 있었다. 아프리카 서북단 지중해에 자리한 카르타고(Carthago)와 이탈리아 반도에 새로이 흥기한 로마가 지중해를 가운데 두고 서로가 국가 존망의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첫 번째 싸움인 제1차 퓨닉 전쟁(BC 264~BC 24, 달리 포에니 전쟁)에선 카르타고의 하밀카르 바르카(Hamilcar Barca)가 전쟁을 일으켰으나 로마한테 무릎을 꿇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아들 한니발이 아버지가 실패한 제1차 퓨닉 전쟁의 참패를 되갚는 차원에서 다시 제2차 퓨닉 전쟁(BC 218~BC 203)을 일으킨다. 아버지 한니발 바르카가 공들여 조성해놓은 이베리아 서남부 카르타헤나를 기지 삼아 로마침공을 위한 전쟁 서곡을 울렸다.


BC 218년 봄, 29살의 한니발은 10만의 대군을 움직였다. 먼저 로마의 기지인 사군토(Sagunto, 현 스페인 바르시아 인근)를 공략해 8개월 만에 무너트리고 피레네 산맥을 넘었다. 곧장 갈리아 지방(현 프랑스)에 들어서서 발롱스에서 론 강을 건너 알프스로 진입한다. 눈 덮인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포 강에 이르렀을 때 그의 군세는 겨우 2만 6천에 불과했다. BC 218년 11월의 찬 겨울이다. 한니발은 포강의 지류인 티치노(Ticino, 오늘날의 Pavia 유역, 달리 Trebia)에서 처음으로 로마군을 맞아 싸움을 벌였다. 한니발은 그의 탁월한 전술로 첫 번째 싸움을 승리로 마무리한다. 여세를 몰아 BC 217년 6월, 반도의 중부에 자리한 트라지메네(Trasimene, 현재 움브리아) 호수가에서 두 번째 로마군을 맞아 이를 격파하고 대승했다.


BC 216년 8월, 한니발은 반도의 동남부에 자리한 칸나에(Cannae)에서 세 번째 로마군과 접전하고서 대승을 거둔다. 로마는 유례없는 처절한 패배를 경험했다. 한니발은 세 차례 전투에서 탁월한 전략·전술로 로마군을 격파하고 로마 안에서 무서운 침공군의 이미지를 떨쳤다. 그러나 싸움이 지속되는 만큼 한니발의 군대는 지쳤고 동맹군의 지원이 약화되고 있는 와중에 로마의 지연작전으로 한층 더한 곤경에 처해졌다. 더이상 로마군과 조우 없이 반도의 남쪽 깔라브리아 지방의 크로토나(Crotona)에서 군세를 정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젊은 스키피오의 등장

한니발의 독주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로마에서는 한 젊은이가 적장의 전술을 학습하면서 훗날의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제1차 트레비아(티치노) 전투에서 한니발에 맞섰던 로마의 집정관(사령관) 스키피오(Publius Cornelius Scipio)의 아들, 스피키오(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였다.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이 같다. 훗날 아들 스키피오가 한니발에 승전 후 그의 이름에 A‘ fricanus’를 덧붙였다. 아버지와 함께 한니발의 침공을 저지하라는 원로원의 명에 따라 아버지는 반도 북부에서, 아들은 이베리아에서 한니발을 저지하려 했으나 한니발이 한발 앞서 알프스를 넘어 반도에 진입한 것이다. 이때 스키피오의 나이 17살, 그는 서둘러 아버지가 저지선을 치고 있는 트레비 전투에 합류했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로마는 한니발의 공격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사령관 스키피오는 적의 포위 속에서 포로의 위기에 몰렸다. 아버지 스키피오가 위기에 처한 것을 보고서 아들 스키피오는 그대로 말을 몰아 적진을 뚫고 간발의 위기에 처한 아버지를 구해 탈출했다. 훗날 이 젊은이가 한니발을 아프리카 자마(Zama)에서 패퇴시킬 줄은 그 어느 누구도 짐작지 못했다.


세 번째 싸움인 칸나에 전투에서 젊은 스키피오는 패배한 전장에서 다시 한 번 한니발의 전술을 그대로 학습했다. 칸나에 전투는 한니발한테 당한 로마의 여러 전투 가운데 가장 처절하게 참패한 싸움이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장차 그의 장인이 될, 집정관 아에밀리우스(Aemilius)를 잃게 되고 구사일생으로 전쟁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선 시칠리아 섬으로 탈출해 카르타고 역습침공을 준비했다. 사실 스키피오는 세 차례 한니발과 맞선 전장에서 그의 전술을 치밀하게, 뼛속 깊이 새겨 학습했다. 16년 후 아프리카 자마에서 그한테서 배운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자마 전투

이탈리아 전역(戰役)에 지쳐있던 한니발한테 본국 카르타고에서 긴급 전령이 닿았다. 로마의 대군이 지중해 바다를 통해 카르타고 영내로 진입, 누미디아 영내로 향하고 있으니 시급히 회군하라는 지시였다. 한니발은 지체치 않고 군세를 돌렸다. 그리고 내륙 자마 인근에서 로마의 스키피오와 일전을 갖는다. 두 나라의 명운을 건 대 회전이었다. BC 202년 10월 19일 대평원의 동이 트자 두 진영은 각기 군세를 다듬고 전투의 주도권을 쥐고자 했다.


한니발은 예의 코끼리를 공격 전력으로 투입했다. 거구의 코끼리들이 장단에 놀라 앞으로 돌진, 스키피오의 보병 대오를 짓밟도록 했다. 그러나 오늘의 로마군한테는 지난날 반도의 여러 곳에서 한니발이 코끼리를 앞세워 펼쳤던 전술이 더이상 먹혀들지 않았다. 일찍 상대의 전술을 익힌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기본 전술을 염두에 두고 보병 대오를 종선으로 펼치고 대오의 간격을 넓혀 돌진해오는 코끼리들이 그대로 공간을 빠져나가도록 유도했다.


코끼리의 진격은 앞으로만 나아가기 마련이다. 육중한 몸뚱이로 되돌아서는 일은 쉽지 않다. 이런 습성을 스키피오는 역으로 이용했다. 트럼펫과 장단을 마구 울려 이들의 대오를 되돌려 거꾸로 자기들의 군진으로 되돌아가 공격하도록 유도했다. 동시에 기병대를 동원, 카르타고의 전열 후미부에 투입, 군진을 마구 교란시켜 놓았다. 그리고선 중무장한 보병대가 창칼로 최후의 유린을 펼쳤다. 이날의 전투는 더이상 한니발의 페이스가 아니었다. 약관 17살 때부터 한니발의 전략, 전술을 학습한 스키피오였다. 한나절이 지나 전세는 확연히 갈라졌다.


15년간의 전투에서 심신이 지쳐 있던 한니발은 끝내 젊은 적장 앞에 창을 던져 버리고 그 길로 몇몇 기병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전장을 떴다. 처절한 이 자마 전투를 가리켜 후세의 사가들은 ‘로마의 칸나에’로 빗대고 있다. 승자 스키피오는 정중했다. 패장 한니발을 달리 처형치 않고 그가 다시 자기의 조국을 위해 헌신할 것을 용인했다. 이날의 그의 관용이 빌미가 되어 훗날 로마 원로원의 카토(Marcus Porcius Cato) 의원이 두고두고 스키피오를 괴롭혔다.

 

두 영웅의 죽음

자마 전투 이후 한니발은 일시적으로 조국을 위해 헌신했다. 그러나 사정은 여의치 않았다. 자마 전투 후 7년이 지났을 무렵, 카르타고는 패배의 늪에서 다시 부흥을 다져갔다. 이에 놀란 로마는 카르타고한테 한니발의 투항을 받아 내려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한니발은 조국에 더이상 폐해를 끼치지 않으려 스스로 망명길에 올랐다.


처음은 시리아의 국왕 안티오쿠스 3세(Antiochus Ⅲ)한테 기탁, 자문관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의 의견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자 셀레우코스(Seleucus) 왕국으로 건너가 함대 지휘를 맡았다. 시리아의 안티오쿠스가 한니발을 로마에 넘기려는 낌새를 알아차리고 다시 비티니아(Bithynia) 왕국의 프루시아스(Prusias) 1세한테 피난처를 구했다. 그도 집요한 로마의 사냥꾼한테 한니발을 넘기려 했다. 한니발은 더 이상 생의 미련을 갖지 않았다. 마르마르 동쪽 바닷가 리비사(Lybissa)에서 평소 지니고 다니

던 독약을 마시고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향년 64세였다.


스키피오는 깜파니아 지방의 바닷가 리테르누미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들려오는 이야기에 몇몇 로마인들이 공명심에 들떠 이미 잊혀진 한니발을 로마 시민 앞에 내세울 음모를 쉼 없이 꾸미면서 사냥꾼들을 풀어놓고 있다는 것이다. 스키피오는 로마의 옛 지인들한테 제발 추악한 음모를 멈추도록 도와주기를 권했다. BC 183년 싸움터에서 옮아온 열병으로 스키피오는 53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 글귀를 남기고서 섭섭한 마음을 표출했다. “은혜를 모르는 조국은 내 유골을 가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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